Side Mirror
이용학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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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서핑을 즐기다 보면 교통과 관련된 화젯거리를 심심치 않게 마주한다. 도로 위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 및 그와 관련된 법적 사안을 주제로 생성된 인터넷 게시물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몰려 토론과 말싸움의 장이 열린다. 특히 상식을 뛰어넘는 주행을 보여주는 차량을 담아낸 블랙박스 영상은 대중의 공분을 사 커다란 이슈로 등극하는 경우가 많다. 모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가 150만 명을 넘어설 만큼 인기를 끄는 광경은 해당 문제에 관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준다. 이토록 교통에 많은 이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차량이라는 도구가 현대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동차와 함께하는 일상을 보낸다. 주차장, 골목, 도로 어디에도 차량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인간은 생업을 위한, 여가를 위한 이동 수단으로 차량에 올라타고 내리며 운전대를 잡는다. 도시, 사회,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 자동차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기구이자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사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필요성과 유익함에도 차량을 소재로 한 담론은 긍정보다 부정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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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손되고 일그러져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쇳덩어리. 안 민 작가의 작업에 담긴 차량의 모습 역시 긍정과는 거리가 멀다. 얼핏 교통사고의 현장이나 그 쓰임을 다해 폐차 처리된 자동차를 묘사한 그림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사고나 박탈에 관한 이야기로 단정 짓기에는 대상이 무엇에 의해, 어떤 상황으로 인해 파괴되었는지에 대한 묘사가 생략되어 있어 생각을 좀 더 깊이 이어 나가게 된다. ‘Conscience’ 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양심’과 붕괴된 차체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이 같은 궁금증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인도에 불법 주차된 차량을 목격하고 일어난 분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파괴된 차량을 그리는 일은 비양심적인 차주에게 가하는 예술가의 응징인 셈이다. 작업을 시작한 계기를 들으니 화면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 차체를 묘사하는 데 거침이 없는 붓질은 흡사 분노에 차 내지르는 주먹질 내지 망치질을 닮아 있다. 그리고 이런 획은 모이고 쌓여 매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분위기를 형성한다. 〈Conscience(62소448x)〉(2017), 〈Conscience(06수898x)〉(2018) 등 초기의 작업은 굵은 선과 넓은 면, 단색화임에도 중량감이 느껴지는 명도를 자아낸다. 그 묵직함에는 작가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깊고 응어리진 분노의 무게가 담긴 듯하다. 이후 등장하는 자동차의 형태는 더 과감하게 짓뭉개져 빳빳한 쇠의 질감이라 느끼기 힘들 정도다. 차량 본연의 물성을 무시하고 흘러내릴 듯 묘사한 표현주의적인 접근이 인상 깊은데 특히 〈Conscience(03거474x)〉(2020)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나고 뒤엉켜 있어, 뒤틀린 양심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로 다가오기도 한다.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은 유화 물감과 함께 아이패드 등의 디지털 매체가 사용되어 한층 깔끔하면서도 정제되고 날랜 분위기를 풍긴다. 경쾌한 붓질은 빠른 속도감을, 자유분방한 선은 익살스러움을 조성하여 비양심자에게 가하는 철퇴에 타격감을 부여한다. 이처럼 노련하고 짜임새 있는 회화는 그 제목에 특정 차량의 번호가 기재됨으로써 하나의 사회 고발로 마침표 찍는다. 예술로 승화된 작가의 분노는 권선징악의 이야기에 담긴 결말처럼 통쾌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대리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작품에는 여전히 무거움이 도사린다. 결백한 바탕 위에 얼룩진 양심이 이 시대를 투영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Coscience〉 연작은 형태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표현 방식을 보여줌에도 오 년이 넘도록 일관되게 모노톤의 색상을 고집하고 있다. 흑백의 대조는 개체에 집중감을 부여하는 장치일 수도 있겠지만, 양심이라는 제목과 결부되어 선과 악, 질서와 혼돈의 상징으로 더욱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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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엇이 옳은 것인가? 왜 대중은 비상식에 분개하고 작가는 비양심에 분노하는가? 양심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이성만으로 양심을 논하지 않는다. 작가가 겪은 일에 관하여 짐작해 보건대, 자동차운전면허라는 모종의 자격을 취득한 이가 ‘인도에 차량을 주차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을 모르고 있었으리라 상상하기는 힘들다.“양심은 도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은 선과 악을 구별해 볼 줄 아는 능력이다. 양심은 오히려 인간 영혼을 이루는 부분, 타고난 것이든 습득된 것이든 영혼의 부분이다.”  - 마틴 반 크레벨드, 『양심이란 무엇인가』, 김희상 옮김, 니케북스(2020), p8.『양심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는 그의 저서에서 양심을 정의하며 영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양심이 경험이나 지식을 통해 학습된 도덕률에 앞서는 본질적인 ‘인간성’임을 시사한다. 길거리와 도로에는 질서와 법규를 명시하는 현판이 즐비하지만, 그것은 존중받기보다 고리타분한 관습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앎’에도 실천하지 않는 세태다. 오히려 자유와 융통성이라는 명목 아래 책임 없는 방종, 이기심이 팽배하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작가의 작업에 담긴 폐차는 그저 규율과 지성의 부재가 만들어낸 혼돈이 아니라, 점차 붕괴되어가는 인간의 영혼을 지시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비록 작품은 폭력을 연상케 하는 극단적인 표현을 활용하여 복수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효과적이다. 예술이라는 적법의 범위 내에서 표현된 물리력은 동물적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해이한 시대정신에 직접적이고 강한 ‘경고’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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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안 민 작가의 작업에 정확히 부합하는 듯하다. 마치 사이드 미러가 그러하듯, 화면 속의 파괴된 차량은 우리 사회의 추한 단면을 비춰 경각심을 일깨우게 만든다. 혹 누군가는 작품에 새겨진 번호가 자신이 아님에 안도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타인의 일로 치부하고 방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이드 미러는 나지막하게 경고한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OBJECTS IN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이라고.